
29일 정부가 2026년도 예산안을 총지출 728조원으로 확정했다. 올해(2025년) 673조3000억원에서 54조7000억원, 8.1%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슈퍼예산’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한국 재정의 무게중심이 한 단계 커졌다.
표면적으로는 인공지능(AI)·연구개발(R&D)·지역균형발전에 과감히 투자해 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리려는 드라이브지만, 동시에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비율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부채 50% 돌파’라는 불안 심리가 반강제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 성장 선도형 재정으로의 전환과 ‘50% 공포’의 허상
2025년까지는 긴축 기조가 이어졌다. 지출 구조조정, 건전성 관리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2026년은 기조가 달라졌다. 정부는 R&D 예산 35조3000억원(+19.3%), AI 예산 10조1000억원을 책정했다. GPU 1만5000장 확보, 세대별 AI 교육, 거점국립대-지역산업 연계 등은 산업 전환과 인재 순환의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메시지다.
정부가 내세운 지출 확대의 명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잠재성장률 하락에 제동을 걸 혁신 투자, 둘째는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는 마중물 역할이다. 국민성장펀드(5년간 100조원 조성 목표)와 K-콘텐츠·관광 육성책은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이다.
총수입은 674조2000억원(3.5% 증가)에 그친 반면, 총지출은 728조원(8.1% 증가)으로 더 크게 늘었다. 그 결과 관리재정수지는 109조원 적자(–4.0%/GDP), 국가채무는 1415조원(51.6%/GDP)까지 상승했다. 사상 처음으로 국가채무 비율이 50%를 넘어섰다.
이 숫자만 보면 위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50% 돌파’라는 상징성이 아니다. 핵심은 부채 증가의 속도와 지출의 질이다.
일부 언론과 정치권은 ‘빚 폭탄’ ‘재정 위기’라는 표현으로 국민 불안을 부추길 태세다. 하지만 국제 비교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OECD 평균 국가부채 비율은 90~100%, G20 평균은 80%대 중후반이다. 미국은 120% 내외, 일본은 260% 이상, 프랑스·영국은 100% 전후, 독일조차도 60%대다.
한국은 선진국 가운데 드물게 절반 수준의 부채비율을 유지해 온 나라다. 이번 50% 돌파는 상징적 의미는 크지만, 국제적 기준에서는 여전히 건전한 편이다. 부채비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향후 증가 속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지출이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되느냐다.
■ ‘좋은 적자’의 조건
확장 재정이 정당화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먼저 ‘선택과 집중’이다. 정부가 제시한 6대 첨단 기술, 지역 거점 산업 등 우선순위가 일관되게 지켜져야 한다. 정치 논리에 따라 매년 방향이 바뀌면 대규모 투자는 공염불이 된다.
다음으로 ‘성과 관리’다. R&D와 AI 예산은 ‘스테이지 게이트(단계별 성과 검증)’를 통해 중복·비효율을 줄이고 실패 시 과감히 중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전성 앵커’다. 부채비율 50%대에 진입한 만큼, 정부는 국가채무의 중기 경로를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반도체·클라우드·전력망 등 AI 인프라 투자가 민간 투자와 수출을 견인할 수 있다. K-콘텐츠·관광 예산도 내수와 고용에 활력을 줄 것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성과 환류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번 슈퍼예산은 성장의 마중물이 아니라 재정 부담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자면 국가채무 비율 50% 돌파를 위기 신호처럼 과장하는 것은 비정의다. 한국 재정은 국제 기준에서 여전히 여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빚의 양이 아니라 그 빚을 어디에 쓰고 어떤 성과를 내느냐다.
728조원 슈퍼예산은 ‘빚더미’가 아니라 미래 전환의 투자다. 국민에게 불안을 주는 숫자놀음 대신 재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성과로 연결할지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필요한 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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