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결신문=백도현 기자] 최근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이 장기화되자 재계 일각과 언론을 중심으로 '주 52시간 근로제' 개편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초격차 기술을 회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삼성전자가 처한 위기의 본질을 외면한 채 노동자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시대착오적 처방'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전문가들은 삼성의 몰락이 부족한 노동 시간이 아닌, 최고경영진의 '전략적 오판'과 '관료주의적 조직 문화', 그리고 '기술 경시'가 빚어낸 구조적 참사라고 입을 모은다.
■ SK하이닉스는 '시간'이 남아서 1등 했나
주 52시간제 완화 주장의 가장 큰 허점은 경쟁사 SK하이닉스의 비약적인 성공 사례에서 드러난다.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똑같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으면서도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 메모리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을 장악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5세대 HBM인 'HBM3E' 칩을 세계 최초로 대규모 양산해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하는 쾌거를 이뤘다. HBM3E 개발을 공식화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만약 주 52시간제가 기술 개발의 족쇄였다면 SK하이닉스의 이 같은 속도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오히려 제도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해왔다. 지난 2년간 삼성 반도체 인력이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를 사용한 시간은 무려 43만 시간에 달한다. 경쟁사보다 더 많이 일하고도 기술 격차가 벌어진 것은 문제가 '노동의 양'이 아니라 '경영의 질'에 있음을 방증한다.
■ 재무통이 장악한 삼성⸱⸱⸱"엔지니어 보고서를 임원이 이해 못해"
베스트셀러 <경제신문이 말하지 않는 경제 이야기>의 저자 임주영 작가는 삼성전자의 위기를 '경영진의 무능'과 '관료화된 조직문화'에서 찾았다. 임 작가는 "삼성의 위기는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이 누적된 결과"라며 "엔지니어보다 비서실과 재무 출신을 우대하는 경직된 문화가 기술 혁신의 씨앗을 말렸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삼성 내부의 '보고서 문화'를 꼬집었다. "언제부터인가 주요 임원들이 기술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엔지니어가 올린 보고서에 기초적인 설명을 담은 주석이 주저리주저리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의 기술적 판단보다 윗선의 입맛에 맞는 재무적 수치가 의사결정의 핵심이 되면서 삼성 특유의 과감한 기술 투자는 실종됐다. 이는 이재용 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 사법 리스크 방어에 골몰하느라 정작 반도체 기술 로드맵을 놓쳤다는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 굴러들어 온 HBM 걷어찬 '안목 부족'
삼성의 전략 부재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은 2013년 HBM 개발 초기 단계다. 당시 일본 닌텐도는 게이밍 성능 향상을 위해 HBM 개발을 의뢰했다. SK하이닉스는 당장의 수익성보다 미래 AI 시대의 성장 잠재력을 보고 끈질기게 개발에 매달려 세계 최초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 시제품을 완성해 놓고도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개발팀을 해체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갈 곳 잃은 삼성의 핵심 개발 인력들이 SK하이닉스로 대거 이동하며 기술 격차를 스스로 벌리는 자충수를 뒀다.
임 작가는 "지금 삼성이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에게조차 밀리는 굴욕을 맛보는 것은 당시 경영진의 근시안적인 '비용 절감' 논리가 빚어낸 참극"이라고 일갈했다.
삼성의 도덕적 해이와 '기술 탈취' 이력 또한 HBM 경쟁력 약화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HBM 제조의 핵심은 칩을 수직으로 쌓아 붙이는 '본딩(Bonding)' 기술로, 이 분야의 세계 최강자는 국내 기업 한미반도체다.
과거 삼성전자는 한미반도체 장비를 납품받아 쓰다가 자회사 '세크론'을 통해 해당 장비를 모방해 생산하게 했다. 이후 한미반도체와의 거래를 끊고 자회사 제품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는 전형적인 대기업의 기술 탈취 행태였다. 이에 한미반도체는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2012년 법원은 한미반도체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미반도체는 삼성전자와의 거래를 사실상 중단하고 SK하이닉스와의 협력을 강화했다. 현재 삼성전자가 HBM 수율 잡기에 애를 먹는 동안, SK하이닉스는 한미반도체의 최첨단 장비를 독점적으로 공급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과거의 오만한 '갑질'이 현재의 치명적인 '공급망 리스크'가 된 셈이다.
■ '생존자 편향의 오류'⸱⸱⸱엉뚱한 곳에 철판 덧대지 말라
임 작가는 현재의 52시간제 개편 논란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전투기 보강 논쟁'에 비유하며 '생존자 편향의 오류(Survivorship Bias)'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미군은 귀환한 전투기들의 날개와 꼬리에 총탄 자국이 많은 것을 보고 해당 부위의 장갑을 보강하려 했다. 하지만 통계학자 아브라함 왈드는 "날개에 총을 맞은 비행기는 살아돌아왔지만, 엔진이나 조종석에 총을 맞은 비행기는 모두 추락했다"며 총탄 자국이 없는 엔진과 조종석을 보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삼성전자와 재계가 주장하는 '노동시간 연장'은 살아돌아온 전투기의 날개에 철판을 덧대자는 꼴과 같다. 격추된 전투기(삼성의 실적 추락)의 진짜 원인은 총탄 자국이 보이지 않는 '엔진(경영진의 전략)'과 '조종석(리더십)'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더 쥐어짜는 것은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의 날개만 무겁게 만들어 추락을 가속화할 뿐이다. 지금 삼성이 수선해야 할 곳은 직원들의 근태 기록부가 아니라 무능하고 무책임한 경영진의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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