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자 ‘주 52시간 근로제’를 손봐야 한다는 요구가 강력하게 제기된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일부 보수 언론이 주도하는 모습인데 가뜩이나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많은 우리나라가 다시 인권 후진국으로 몰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특히 삼성전자 부진의 가장 큰 책임은 이재용 회장과 경영진의 무능력에 있지만, 언론들은 이를 지적하기는커녕 얼마 전 이 회장 2심 무죄를 기점으로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에서 벗어나 날개를 달았다”며 띄워주기에 바쁜 모습이다.
주 52시간제 수정 요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전체 노동자의 근로시간을 늘리는 건 명백한 법 위반이므로 반도체 등 특정 연구개발에 한정해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동일한 조건에서 이룬 SK하이닉스의 성공은 애써 외면한다.
삼성전자 부진의 원인은 누구나 알듯 급속한 성장세인 AI 관련 HBM(고대역폭메모리) 기술 부족 탓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SK하이닉스는 기술이나 실적 면에서 삼성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를 뒤집은 건 지난해 초 5세대 HBM인 'HBM3E' 칩을 세계 최초로 대규모 양산, 엔비디아에 이를 납품하면서다. 2023년 8월 HBM3E 개발을 알린 지 불과 8개월 만이었다. 기존에도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4세대 HBM인 HBM3를 독점 공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SK하이닉스가 52시간제를 위반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삼성전자는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를 오랫동안 시행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삼성 반도체 인력의 특별연장근로 시간은 무려 43만 시간이나 된다.
결국 52시간제는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을 설명할 수 없다.
임주영 작가 “‘생존자 편향의 오류’ 범하지 않길”
이와 관련, 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경제신문이 말하지 않는 경제 이야기> 저자 임주영 작가는 “삼성전자의 부진은 이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임 작가는 “엔지니어보다 비서실과 재무 출신을 우대하는 관료화되고 경직화된 조직문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정신 팔렸던 이재용 본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경영진에 올라가는) 보고서에 설명이 따로 붙은 주석이 주저리주저리 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요 임원들이 엔지니어가 올린 보고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경영진의 비전문성을 꼬집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삼성의 반도체 부진엔 두 가지 결정적 이유가 있다.
먼저 안목 부족이다. 2013년도에 일본 닌텐도가 게이밍에 적합한 HBM 개발을 의뢰했는데 향후 미래 성장성과 수익성을 높게 평가한 SK하이닉스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해 결국 세계 최초로 HBM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삼성전자도 HBM 시제품을 완성했지만 미래 성장성이나 비용, 수익성 등의 문제를 들어 HBM 개발팀을 아예 해체해 버렸다. 팀이 해체되자 삼성 개발자들이 SK하이닉스로 대거 이동한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임 작가는 “지금 삼성전자 HBM 기술력 경쟁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한참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에조차 밀리는 주된 이유”라며 “물론 이 모든 결정은 이재용을 비롯한 경영진의 결정이었다”고 일침을 놨다.
다음으로는 ‘기술 탈취’다.
HBM 제조 장비의 가장 핵심은 메모리반도체를 붙여주는 ‘본딩’ 장비다. 이 장비의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는 한미반도체다.
한미반도체는 과거 2000년대 초 반도체 후공정에 쓰이는 패키징 장비를 삼성전자에 납품했던 적이 있다. 한미반도체가 자체 개발한 이 장비는 글로벌 시장 점유율 70%를 넘어설 정도로 압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똑같은 장비를 만드는 세크론이라는 자회사를 만들더니 차츰 한미반도체와 거래를 줄여가며 세크론 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은 한미반도체와 거래를 끊었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한미반도체 시장을 뺏기 시작했다. 바로 전형적 기술 탈취다. 이에 한미반도체는 특허 침해소송을 제기했고 2012년 한미반도체가 전부 승소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승소 판결을 받아낸 매우 드문 사례였다.
이를 계기로 한미반도체는 HBM 본딩 장비를 삼성전자에 팔지 않는 건 물론이다. 한미반도체의 주 고객은 SK하이닉스다. 삼성전자의 HBM 개발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 작가는 “지금도 걸핏하면 택배, 물류센터, 건설현장 등에서 장시간 일하다 과로사로 쓰러지고 있는 노동자들을 먼저 생각한다면 52시간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며 “생존자 편향의 오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생존자 편향의 오류란 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전투기 추락에 관한 잘못된 판단을 빗댄 논리다. 당시 미국은 전투기 격추가 잇따르자, 이를 줄이기 위해 총격을 받았던 전투기를 꼼꼼히 분석했는데 그 결과 생환한 전투기의 날개와 꼬리에 가장 많은 총탄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에 미국은 날개와 꼬리에 강한 철판 보호막을 덧댔다. 하지만 여전히 격추되는 전투기는 줄지 않았다. 분석이 완전히 틀렸기 때문이다. 날개와 꼬리에 총격을 입은 전투기는 모두 생환한 전투기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보호막을 강화하려면 날개와 꼬리가 아닌, 조종석이나 엔진 등 다른 곳에 덧댔어야 했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 ‘생존자 편향의 오류’라고 부른다. 원인과 결과를 분석할 때 범하는 오류 중 가장 잘못된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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