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고금리 경기 침체 방어 목적⸱⸱⸱세수 부족 겹치면 '재정 보릿고개' 현실화
25개 자치구 교부금 조기 집행 압박⸱⸱⸱이자 수익 감소 등 '보이지 않는 손실' 우려도
[예결신문=김지수 기자] 서울시가 올해 상반기에만 약 29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시중에 푼다. 이는 행정안전부가 제시한 지방재정 신속집행 목표치(60.5%)를 상회하는 62%로, 역대 최대 규모이자 가장 공격적인 재정 운용 목표다.
시는 고금리와 고물가로 위축된 민생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마중물' 차원이라고 설명하지만, 재정 전문가들과 일선 자치구 예산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하반기 '재정 절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한 세수 감소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상반기에 실탄을 모두 소진할 경우 하반기에는 필수 경비조차 감당하기 힘든 사태가 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 역대급 '돈 풀기', 배경은 건설 경기 부양과 민생 안정
7일 본지 분석에 따르면 서울시는 올해 예산 약 48조원 중 신속집행 대상액 46조5000억원의 62%인 28조8000억원을 상반기 집행한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목표였던 60.5%보다 1.5%포인트 상향된 수치로, 금액으로 환산하면 수조원이 더 늘어난 규모다.
시가 이처럼 무리해 보일 정도로 목표치를 높여 잡은 명분은 뚜렷하다. 건설 경기 침체 방어와 취약계층 지원이다. 통상 정부나 지자체의 예산 집행은 하반기에 몰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앞당겨 상반기에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경제 성장률 저하를 막겠다는 '케인즈주의적' 처방인 셈이다.
실제로 시는 대규모 SOC(사회간접자본) 사업과 물품 구매, 용역 계약 등의 선금 지급 한도를 최대 80%로 확대하고 긴급 입찰 제도를 적극 활용해 자금의 흐름을 뚫겠다는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고물가가 지속되면서 서민 경제의 체감 경기가 매우 차갑다"며 "공공 재정이 먼저 지갑을 열어 지역 경제의 온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반영된 목표"라고 설명했다.
■ "세수 펑크나면 대책 없다"… 하반기 '재정 보릿고개' 우려
문제는 세입이다. 곳간을 채울 돈이 충분하다면 일찍 쓰는 것이 문제 되지 않지만, 현재 시와 자치구의 세입 여건은 녹록지 않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부동산 거래 절벽이 이어지면서 취득세 등 지방세 수입이 예상을 밑돌 가능성이 커서다.
정부의 국세 수입 저조로 인한 지방교부세 감소 우려가 여전한 가운데, 자체 세입마저 흔들리면 시 재정은 '이중고'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상반기에 가용 재원의 62%를 쏟아붓게 되면 하반기에는 예기치 못한 재난 대응이나 추가적인 복지 수요가 발생했을 때 대응할 여력이 전무해진다.
한 지방재정 전문가는 "신속집행은 세입이 안정적일 때 경기 부양 효과를 내는 것이지 세수 결손이 예상되는 시기에 무리하게 추진하면 하반기 유동성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며 "마치 월급의 60%를 보름 만에 다 써버리고 남은 보름을 빚으로 버티는 가계부와 다를 바 없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일부 자치구에서는 벌써부터 "하반기에는 추경은커녕 감액 추경을 걱정해야 할 판"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 이자 수입 증발, 행정력 낭비…'속도전'의 부작용
'이자 수입 감소'라는 보이지 않는 기회비용도 간과할 수 없다. 서울시와 25개 자치구의 공공예금 이자 수입은 연간 수천억원 규모로, 이는 쏠쏠한 세외수입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신속집행을 위해 정기예금에 예치된 자금을 조기에 해지하거나 대기성 자금을 시중으로 바로 내보내게 되면 막대한 이자 수익을 포기해야 한다.
예결신문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 본청과 자치구가 신속집행 목표 달성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이자 수익은 연간 수백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세수 부족을 메울 귀중한 재원이 '집행률 달성'이라는 명목 아래 증발하는 셈이다.
일선 현장의 행정력 낭비와 비효율적 집행도 고질적인 문제다. 목표 달성률인 62%를 맞추기 위해 불필요한 사무용품을 미리 대량 구매하거나, 공사가 진행되지도 않은 현장에 선급금만 먼저 지급하는 '밀어내기식 집행'이 횡행할 가능성이 높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시 A구 관계자는 "행안부와 서울시 평가에서 페널티를 받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써야 한다"며 "연말에 보도블록을 뒤집는 관행이 상반기에는 '선결제' 관행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질적인 경기 부양 효과보다는 장부상의 집행률 맞추기에 급급한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 '건전 재정' 기조와 엇박자…유연한 재정 전략 필요
서울시는 건전 재정을 강조하면서도 신속집행이라는 상반된 카드를 동시에 꺼내 들었다. 전문가들은 목표치 달성 위주의 양적 평가에서 벗어나 '자금의 질'을 따지는 집행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단순히 돈을 빨리 쓰는 것이 아니라, 승수 효과가 높은 사업에 자금이 적시에 투입되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하반기 세수 부족분에 대한 명확한 대책 없이 상반기 지출만 독려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통합재정수지 적자 폭이 확대될 경우, 결국 지방채 발행으로 이어져 미래 세대에 빚을 떠넘기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경기는 살려야 하지만 곳간은 비어가는 딜레마 속에서, 서울시의 '상반기 29조 투하' 작전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확실한 것은 올 하반기 시와 자치구의 재정 운용은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보릿고개'를 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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