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조 규모 신주 발행 유력⸱⸱⸱'밸류에이션 재평가' 기대
코스피 대장주 이탈에 따른 수급 공백 우려⸱⸱⸱3차 상법개정 대상 '관심'
[예결신문=김용대 칼럼니스트] SK하이닉스가 미국 증시 상장을 공식 추진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내 자본 시장의 한계를 탈피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직접 투자금을 조달하겠다는 포석이다.
ADR(American Depositary Receipt, 미국 주식예탁증서) 상장은 외국 기업이 미국 증시에서 자사 주식을 담보로 해 달러로 증권을 거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25일 투자은행(IB) 업계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위한 공모 등록신청서(Form F-1)를 제출했다.
AI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 위한 조 단위 투자 재원 마련
SK하이닉스의 이번 미국행은 천문학적 규모의 설비 투자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결정됐다. 현재 추진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과 미국 인디애나주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 등 AI 반도체 공급망 확대를 위해 향후 수년간 수십 조 원의 자금 투입이 불가피하다.
회사는 이번 ADR 상장을 통해 약 15조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다. 이는 국내 기업의 해외 상장 사례 중 역대 최대 규모에 해당한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이날 경기 이천 본사에서 열린 제78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AI 메모리 분야의 기술 리더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적기 투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글로벌 거버넌스 강화와 자본 조달 창구 다변화를 통해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겠다"고 밝혔다. 회사는 연내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르면 올 하반기 뉴욕 증시 입성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신주 발행에 따른 지분 희석 논란과 주주 반발
자금 조달 방식은 자사주 활용보다는 신주 발행 방식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주주환원 정책의 일환으로 기존 자사주 소각 방침을 세운 상태여서 대규모 투자금을 즉각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규 주식을 발행해 미국 투자자들에게 매각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장 기존 주주들의 지분 가치가 하락하는 '희석 효과'는 피하기 어렵다. 시장에서는 전체 주식의 약 2~3% 수준인 1500만 주 내외가 신규 발행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단기적인 주가 하락 압력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등 기관 투자자 측에서는 신주 발행 대신 저금리 정책 자금이나 회사채 발행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이크론·엔비디아 대비 저평가 해소와 재평가 가능성
지분 희석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번 상장이 장기적으로는 주가에 긍정적일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인해 글로벌 경쟁사 대비 저평가받아온 회사의 가치를 재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여서다.
현재 SK하이닉스의 선행 주가수익비율(Forward P/E)은 8~10배 수준에 머물러 있으나 미국 시장의 마이크론은 14배 이상, 엔비디아는 30배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대만의 TSMC의 경우 ADR 상장 후 본국의 주식이 덩달아 상승한 전례가 있다.
하이닉스가 미국 증시 상장 후 마이크론 수준의 멀티플만 인정받아도 주가 상승 폭이 지분 희석분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 현지 투자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글로벌 패시브 자금이 유입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코스피 수급 공백 및 국내 증시 영향
시총 2위 기업의 해외 상장은 국내 증시 전반의 수급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본주 대신 미국 ADR로 매수세를 옮기는 '자금 이탈' 현상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반도체 섹터에 배정된 외국인 자금이 분산될 경우 코스피 지수의 상승 동력이 약화되는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이날 코스피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하이닉스 미국 상장 공식화 소식에 차익 실현 매물을 쏟아내며 주가 변동성을 키웠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글로벌 밸류에이션을 따라가는 호재가 될 수 있으나, 국내 증시 전체로 보면 우량주 이탈이라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SK하이닉스 측은 "ADR 상장은 기업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며 "구체적인 공모 방식과 규모는 주주 가치 제고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향후 하이닉스가 미국 상장 과정에서 신주 발행 비중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와 추가적인 주주 환원책을 제시하느냐가 이번 미국행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상법 개정안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저촉 여부 쟁점
이번 미국 상장은 최근 정치권과 학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가속화된 '제3차 상법 개정안'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첫 번째 대형 사례가 될 전망이다.
개정안의 핵심인 '이사 충실의무의 주주 확대(상법 제382조의3 개정)'가 시행될 경우, 신주 발행을 동반한 ADR 상장은 기존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침해했다는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자금 조달이라는 경영상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신주 발행으로 인한 지분 희석이 주주 가치 훼손으로 직결된다면 이사진이 '배임'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
반면, 미국 상장이 오히려 거버넌스 우려를 씻어내는 '정공법'이 될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까다로운 공시 기준과 주주 보호 규정을 적용받게 되면, 국내 증시에서 불거졌던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가 강제로 개선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서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이날 성명을 통해 "SK하이닉스가 이미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신주를 발행해 ADR 상장을 추진하는 것은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를 희석하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이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상법 개정 취지에도 역행한다"며 "무리한 신주 발행 대신 보유 중인 자사주를 활용하거나 소각 후 상장하는 방식이 주주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미국 자본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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