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올초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글로벌 합의’의 세부 내용이 드러나면서 국내 원전 산업이 사실상 미래 성장 동력을 내줬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합의는 체코 원전 수주 과정에서 불거진 지적재산권 분쟁을 종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이다.
■ 로열티, 50년간 1기당 1조1500억⸱⸱⸱사실상 영구적 권리 헌납
24일 정치권에 따르면 한-체코 합의문에는 한국이 해외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에 로열티 1억7500만 달러(한화 약 2400억 원)를 지급하고, 별도로 물품·용역 6억5000만 달러(약 9000억원)를 발주하도록 하는 조항이 담겼다. 합계는 원전 1기당 약 8억2500만 달러(1조1500억원)에 달한다.
이 구조가 물가 연동 조건으로 50년간 유지된다는 점도 문제다. 이는 국제 특허 보호 기간(20년)을 훌쩍 넘어서는 일방적 계약으로, 사실상 웨스팅하우스의 ‘반영구적 권리’를 인정한 꼴이다. 여기에 앞으로 수출 원전에 들어가는 핵연료를 100% 웨스팅하우스 제품으로 사용해야 하고, 행여 한국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지급 불이행)을 대비하기 위해 원전 1기당 4억 달러(약 5600억원) 규모의 보증신용장(LC) 발급까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 수익성 급락···체코 수주도 ‘반쪽짜리’
체코 두코바니 원전(2기, 약 26조원 규모) 수주가 전 정부의 큰 성과로 포장됐지만, 막대한 로열티와 조달 의무, 현지화 비용을 더하면 한수원과 국내 밸류체인에 돌아올 실익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한수원은 “로열티 대부분이 물품·용역 비용”이라며 “미국 시장 진출 시 공동 파이프라인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로 분쟁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들은 “물품과 용역 비용은 로열티만 아니었다면, 국내 기업들이 가져갈 수익”이라며 “결국 국내 기업 몫의 이익이 대거 잠식된 꼴”이라고 반박한다.
■ 선진시장 진출 제한, ‘철수 러시’
특히 합의에는 한국의 선진시장 원전 수주 제한 조항이 포함됐다. 북미와 유럽연합(체코 제외),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 등에서 한국은 독자적으로 원전 수주를 추진할 수 없게 됐다. 남은 지역은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현재 전 세계에서 발주 예정이거나 확정된 원전은 414기다. 이번 합의에 따라 우리나라가 수주할 수 있는 물양은 414기 중 38기, 전체의 9%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9% 지역마저도 중국과 러시아가 장악한 곳으로, 현재 우리나라가 끼어들 틈은 없다. “사실상 한국의 수출 가능 지역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최근 한국은 스웨덴·슬로베니아·네덜란드·폴란드 등 유럽 주요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입찰을 포기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유럽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저가 수주 논리 자체가 무너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박시동 경제평론가는 “오로지 윤석열의 성과를 위해 저가 수주도 모자라 한국의 원전산업 자체를 고사시켰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 SMR 독립 기술도 미국 검증에 종속⸱⸱⸱미래 먹거리도 넘겼다
문제는 또 있다. 차세대 에너지 시장의 핵심이자 대안으로 꼽히는 소형모듈원전(SMR)이다. 우리나라 민간 업체가 기술 개발을 거의 마무리한 분야로, SMR 시장이 본격화하면 사실상 우리나라가 독식할 수 있는 미래 먹거리였다.
하지만 이 분야 역시 사실상 미국 승인 없이는 상업화가 어렵게 됐다. 합의에 따르면 한국이 SMR을 수출하거나 사업화할 경우, 웨스팅하우스가 ‘자사 기술 포함 여부’를 검증할 권한을 갖는다.
만일 웨스팅하우스가 한국의 SMR을 검증한 후 ‘자사의 기술을 침해했다’고 결론 내면 이 역시 수출 길이 막힌다. 한국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에도 검증은 다름 아닌 미국 소재 제3기관이 맡는다. 이는 국내 기업이 독자 기술을 보유했더라도 해외 진출 과정에서 웨스팅하우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구조다.
■ “노예 협상 넘은 매국적 합의”
원전 업계는 이번 합의를 두고 “노예 협상”이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더 나아가 ‘매국적 합의, 식민적 합의’라며 비판한다. 국내 원전 기술은 지난 수십 년간 독자 개발을 거쳐 자립에 근접했음에도 이제 와 ‘원천기술 부재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박 평론가는 “그동안 엄청난 비용을 들여 연구개발을 해온 정부와 국내 기업들은 뭐가 되는 것이냐”며 “한수원이 비난을 면하기 위해 국내 기업들의 향후 완전한 기술 자립 가능성까지 막아버린, 다시 말해 한국이 앞으로 원전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도록 미래를 팔아버린 것”이라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윤석열이 자기 지지율을 끌어올리려고 전 국민을 속이고 엄청난 혈세를 이미 탕진했거나 앞으로도 탕진할 예정인 합의”라며 “반드시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대통령실은 이미 진상 조사를 지시했고, 야권은 국정조사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수원은 ‘기밀 유지 의무’를 이유로 세부 조항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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