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결신문=백도현 기자] 삼양1963이 열풍이다. 수많은 ‘먹방’에서는 앞다퉈 이를 다루고 있다. 특히 삼양식품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은 “나 돌아갈래”를 외치고 있다.
한 회사의 운명이 국가 권력과 미디어의 손끝에서 쑥대밭이 된 적이 있다. 1989년 11월 3일, 검찰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투서를 근거로 다수의 라면·마가린 업체 관계자를 “공업용 우지(소기름)를 라면에 썼다”며 전격 구속했다. 바로 ‘우지 파동’이다.
1980년대 초까지 부동의 점유율 1위를 달리던 삼양은 당시 ‘신라면’ ‘짜파게티’ ‘육개장 사발면’ ‘너구리’를 앞세운 농심에 밀려 2위로 내려앉은 상태였다. 여기에 우지 파동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삼양라면을 먹지 말라”했고 전국에서 100만 박스의 삼양라면이 폐기됐다. 직원들은 대거 쫒겨났고 하청업체들은 도산했다. 삼양은 곧바로 10%대 점유율로 추락했다.
그러나 이 분노의 출발점은 과학이 아니라 프레임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공업용’이라는 단어의 마력이다. 당시 발표와 보도는 ‘비누·윤활유에 쓰는 기름’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국립보건원은 정제 전 원유를 정제하면 식용에 쓸 수 있다는 점을 곧바로 확인해 줬다. 식품회사 직원들이 구속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직원들은 풀려났다.
그럼에도 언론들은 ‘공업용=유해’라는 등식으로 “삼양라면은 비누 기름 라면”이라는 비과학적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1997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 누명을 걷어내기까지 무려 8년이 걸린 지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우지’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고 삼양에는 지독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농심과의 격차는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뒤처진 후였다. 그럼에도 이를 주도했던 언론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무죄를 받았단 사실도 거의 다루지 않았다.
특히 조선일보는 심지어 ‘식품 살인’이라는 막말을 써가며 광적인 집착증세를 보였다. 국립보건원 발표 이후엔 “정부 발표가 났지만 찜찜하다”고 했고 무죄가 난 후에도 “‘위해 식품 만들면 중형 응징을 가해라’는 기사를 쓰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슷한 사건은 또 있다. 1998년 7월 ‘포르말린 통조림’ 소동이다. 당시 검찰은 “골뱅이 통조림 제조업체 3곳이 방부 처리를 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포르말린을 주입했다”는 혐의로 업체 대표들을 구속 기소했다.
또 언론들이 앞다퉈 받아쓰기 보도를 시작했다. “먹는 걸로 장난치는 것들은 혼내줘야 한다”는 말은 이때 생겼다.
그런데 결론은 무죄였다. 업체들은 포르말린을 주입한 적이 ‘진짜’ 없었기 때문이다. 통조림에서 검출된 성분은 포름알데히드였다. 이 성분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물질이고 인체에 무해하다. 특히 완성된 통조림에 어떤 물질을 주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사건도 최종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 사이 기업은 망했고 관련 회사 30곳도 모조리 도산했다.
검찰은 공업용 우지가 유해하다는 근거도 없이 삼양을 쳤고, 곧 무해하다는 결론이 났음에도 공소를 이어갔다. 또 그 아집은 대법원판결 때까지 이어졌다. 회사는 망했지만, 당시 전설의 ‘공안’ 출신인 김기춘 검찰총장, 고영주 검사 등은 출세를 이어갔고 언론사는 세를 더욱 확장했다. 투서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지금도 모른다.
‘피의사실 공표→받아쓰기 보도→여론재판→기업붕괴→뒤늦은 무죄’라는 한국형 비극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 깊다.
삼양은 버텼다. 그리고 정확히 36년이 흐른 2025년 11월 3일 ‘삼양 1963’을 출시했다. 살아남은 것도 대단하지만 자신들에겐 트라우마가 된 ‘우지’를 아예 전면에 내세웠다.
김정수 부회장은 “창업주이자 제 시아버님인 고 전중윤 명예회장의 한을 조금은 풀어드리지 않았나”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옥에서 돌아온 라면”이라는 어느 유튜버의 표현이 가슴에 박히는 장면이었다.
[저작권자ⓒ 예결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