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결신문=신세린 기자] "공공(Public)이 훌륭하면 개인은 사유(Private)의 욕망에 덜 집착하게 된다."
건축가 유현준 홍익대 교수가 설파하고 이제는 정부의 국정 철학으로 떠오른 이 문장은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단면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대한민국 부동산 병폐의 근원은 단순히 공급 부족이 아니라 '공공의 빈곤'에 있다. 우리는 그동안 공원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 공간이 빈약했기에 내 집을 좋은 입지에, 평수를 늘리는 데 목숨을 걸었다. 공공이 제공하는 삶의 질이 형편없었기에 사유재산을 축적해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셈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공공주택'은 곧 '빈곤'의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 그 낡은 등식을 깨려고 한다. 지난 12일 생중계된 이재명 대통령 주재 업무보고회에서 대통령은 "왜 LH는 좋은 입지의 땅은 민간에 매각해 천문학적 이익을 올리게 하고, 공공은 외진 곳에 짓느냐"며 "가장 좋은 땅에, 가장 좋은 아파트를 지어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을 검토하라"고 했다. 맞다. 이것이 무한 경쟁과 부동산 계급 사회로 병든 대한민국을 치유할 유일한 해법이다.
■ LH의 배신⸱⸱⸱노른자 땅은 건설사에, 서민에겐 소외감을
그동안 대한민국 공공주택은 '차별'의 역사였다. 시민의 주거 안정을 위해 존재하는 LH조차 '수익성'이라는 논리 뒤에 숨어 공공성을 훼손해 왔다. LH는 소위 '상급지'라 불리는 서울의 역세권, 입지 좋고 용적률 높은 알짜배기 땅은 민간 건설사에 매각했다.
민간 기업들은 그 땅에 화려한 브랜드 아파트를 짓고 천문학적인 분양 수익을 올리며 배를 불렸다. 반면, 정작 서민을 위한 공공 아파트는 도시 외곽의 교통이 불편한 곳, '비인기 지역'으로 밀려났다. 결과는 참혹했다. 입지에서부터 밀려난 공공 아파트는 품질조차 조악했다. 층간 소음, 저렴한 내장재, 심지어 외벽 페인트칠도 민간 아파트와 확연히 구분되는 칙칙하고 저렴한 색상을 사용, 건물 외관에서부터 "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시민들에게 차별감과 박탈감을 심어준 꼴이다. 아이들은 아파트 브랜드로 편을 가르고, 어른들은 공공 임대 주택을 기피 시설로 여기는 이 기형적인 세태는 바로 '실패한 공공 정책'이 만든 괴물이다.
해법은 명쾌하다. LH와 공공기관이 보유한 서울 역세권, 핵심 요지의 땅을 더 이상 민간업자에게 팔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민간 하이엔드 브랜드 못지않은 고품질의 공공 아파트를 지으면 된다.
"뉴요커들이 좁은 집에 살아도 억울하지 않은 이유는, 센트럴 파크가 내 집 정원이고 거실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잠만 자는 곳이고, 도시가 내 집인 거예요."- 유현준 교수(알쓸신잡 2)
뉴욕의 센트럴 파크 주변 거주민들이 좁은 집에 살아도 높은 삶의 질을 누리는 것처럼 단지 내에 수영장과 도서관이 있고 최고급 자재로 마감된 '명품 공공 아파트'가 탄생한다고 상상해보자. 굳이 수십 년간 빚의 노예가 되어 민간 아파트를 소유하려 발버둥 칠 필요가 있을까? 공공이 훌륭해지는 순간, 집은 '투기의 대상'에서 진정한 '휴식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 '160조' 빚더미?⸱⸱⸱진짜 빚일까
그렇다면 LH는 왜 지금까지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이 공기업은 늘 "돈이 없다", "부채가 너무 많다"고 항변해 왔다.
"LH는 부채가 160조~170조원에 달하는 공룡 빚쟁이 조직이라 더 이상의 투자가 불가능하다." 그동안 기획재정부와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왔던 단골 레퍼토리다. 이 프레임은 LH가 공공개발을 포기하고 알짜 토지를 민간에 팔아치우는 가장 강력한 명분이 돼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르다. 이것은 명백한 '회계적 착시'이자 '대국민 사기극'에 가깝다는 것이다.
팩트부터 체크해보자. LH의 부채 총액이 약 160조원이라는 통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물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중 약 100조원은 임대주택 보증금, 즉 국민에게 잠시 받아둔 '전세금'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집주인도 세입자에게 받은 전세 보증금을 두고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증금이라는 빚(부채)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집(자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증금을 돌려줘야 할 때가 오면 새로운 세입자를 받거나 정 안되면 집을 팔면 그만이다. 전세금을 부채비율에 넣어 집주인을 파산 직전의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LH에는 이런 셈법이 적용된다. LH가 보유한 막대한 부동산 자산의 가치(시가)는 빼놓고 장부상 잡히는 '보증금 부채'만 부각해 공포감을 조성한다. 100조원의 보증금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보다 훨씬 큰 가치의 공공주택 자산을 LH가 보유하고 있다는 '건전성의 증거'다.
기업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부채비율을 보면 이 '착시'는 더 명확해진다. 현재 LH의 부채비율은 약 122% 수준이다. 일반적인 제조업에서도 양호하다고 평가받는 수치다. 그렇다면 LH 대신 아파트를 짓고 수익을 가져가는 민간은 어떨까? 업계에 따르면 주요 민간 시행사들의 부채비율은 1000%를 우습게 넘긴다. 자기 자본은 쥐꼬리만큼 넣고, 나머지는 죄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일으켜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리기 때문이다.
부채비율 1000%가 넘는 민간 기업이 아파트를 지으면 '건설 경기 활성화'라고 치켜세우면서 부채비율 122%에 불과한 초우량 공기업인 LH가 아파트를 짓겠다고 하면 '재무 건전성 악화'를 들어 가로막는다.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면 무엇인가.
LH가 돈이 없어서, 빚이 많아서 좋은 땅에 직접 아파트를 못 짓는 것이 아니었다. '안' 지었던 것이다. 회계 장부상의 숫자를 비틀어 공공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 이익을 민간 건설 카르텔에 몰아주던 관행, 이재명 정부는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LH보다 재무구조가 10배는 더 위험한 민간에게 공공의 땅을 넘기는 것이야말로 국가적 배임이다. 이에 이 대통령은 "자회사를 만들어 임대보증금 격인 100조원이라는 부채를 떼어내 이관하면 그런 착시는 사라진다"며 해법을 제시했다.
이자는 한 푼도 나가지 않는 '이자 없는 부채(보증금)'를 핑계 삼아 공적 책임을 회피하던 시절은 끝났다. LH는 이제 핑계를 접고 그 탄탄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입지에, 최고의 자재를 써서 국민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집을 지으면 된다. 돈은 충분하다.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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