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출하량 점유율 역전, 프리미엄 시장 최후의 보루마저 위협
[예결신문=신세린 기자] 대한민국 수출의 대들보인 반도체와 가전 산업에 전례 없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던 'K-테크'의 자존심이 중국의 가파른 성장세와 자국 중심의 파격적인 보조금 정책에 밀려 뿌리째 흔들리는 양상이다.
특히 기초 원천 기술과 설계 분야에서 이미 중국에 추월당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오면서 국가 차원의 R&D 예산 재설계와 전략적 대응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 반도체 기초역량 '충격의 성적표'⸱⸱⸱생산은 앞서나 설계는 뒤처져
24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3대 게임체인저 분야 기술수준 심층분석' 브리프에 따르면 한국의 반도체 분야 기초역량은 사실상 모든 지표에서 중국에 뒤처졌다.
최고 기술 선도국 대비 기술 수준을 수치화했을 때 차세대 먹거리인 '고성능·저전력 AI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84.1%)은 중국(88.3%)에 미치지 못했다. 전기차 및 에너지 산업의 핵심인 ‘전력반도체’는 한국 67.5%, 중국 79.8%로 그 격차가 12%p 이상 벌어졌다. 그동안 한국의 절대적 성역으로 여겨졌던 '메모리 기술' 분야조차 한국(90.9%)이 중국(94.1%)보다 낮은 2위로 평가되며 충격을 안겼다.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은 기술 생애주기별 분석이다. 한국은 제조 공정과 양산 기술에서는 여전히 중국을 앞서고 있지만,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기초·원천 기술'과 '설계(팹리스)' 분야에서는 중국에 주도권을 내준 상태다. 전문가들은 핵심 인력의 해외 유출과 더불어 정부의 R&D 투자 효율성 저하를 주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 TV 시장의 지각변동…'물량' 넘어 '안방'까지 점령한 중국
가전 분야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TCL, 하이센스 등 중국 브랜드의 글로벌 TV 시장 출하량 점유율은 31.3%를 기록하며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합산 점유율(28.4%)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2020년까지만 해도 33.4%에 달했던 한국의 점유율이 20%대로 추락하는 사이 중국은 24.4%에서 30%를 돌파하며 가파른 수직 상승 곡선을 그렸다.
격차는 매출 부문에서도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19년 연속 매출 1위를 수성하고 있지만, 전체 매출 비중은 2020년 31.9%에서 지난해 28.3%로 하락했다. 반면 중국의 TCL과 하이센스는 각각 10%대 매출 점유율을 확보하며 한국 턱밑까지 추격했다.
특히 중국은 한국의 주무대였던 75인치 이상 초대형 TV 시장에서 지난 5년간 점유율을 3배 이상 끌어올리며 '프리미엄=한국, 저가=중국'이라는 기존의 공식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물론 2500달러 이상의 초고가 시장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8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물량 공세가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R&D 투자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된다면 최후의 보루인 프리미엄 시장 역시 시간문제라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 트럼프 2기 행정부와 불확실성…예산·정책 패러다임 바꿔야
반도체와 TV 산업의 위기는 단순히 개별 기업의 경쟁력 문제를 넘어 급변하는 글로벌 정치 지형과 맞물려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미·중 갈등 심화와 공급망 재편이 한국 기업들에 유례없는 압박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이 자국 중심의 반도체 보조금 정책을 강화하고 중국이 이에 맞서 자국 기술 육성에 사활을 걸 경우, 그 사이에 낀 한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예결신문이 분석한 국내 산업계의 제언을 종합하면, 현재의 위기 돌파를 위해서는 세 가지 핵심 과제가 선결돼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R&D 예산 집행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단순한 물량 투입이 아닌, 기초 원천 기술과 AI 반도체 설계 등 중국에 뒤처진 '고부가가치 설계 자산' 확보에 예산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둘째, 핵심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다. 기술 수준 하락의 주범으로 꼽히는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파격적인 인센티브와 연구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셋째, 지자체와 연계한 첨단 산업 생태계 확장이다. 시스템반도체와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의 생산 거점을 넘어, 연구와 실증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클러스터 조성에 국가 예산이 전략적으로 배분되어야 한다.
이승훈 세종대학교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제조 기술은 자본 투입으로 단기간에 따라잡힐 수 있지만, 설계와 기초 원천 기술은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정부 R&D 예산이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반도체 설계 및 신소재 분야에 보다 과감하고 유연하게 집행되어야만 중국의 추격을 따돌릴 초격차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지금의 경고등을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할 것인지, '대전환의 신호'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따라 한국 경제의 10년 뒤 모습이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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