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옥수수 자급률 1%대⸱⸱⸱'식량 무기화' 시대 공급망 안보 비상
EU 산림법부터 중대재해 금융 페널티까지⸱⸱⸱전방위 규제 파고에 '밸류체인 내재화' 사활
[예결신문=신세린 기자] K-푸드가 글로벌 시장에서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는 상황에서 정작 국내 음식료 업계의 기초 체력은 'ESG 리스크'에 위협받고 있다. 단순한 원재료 가격 상승을 넘어 기후 위기에 따른 구조적 인플레이션, 자국우선주의에 기반한 공급망 붕괴, 금융권의 자금줄까지 조이는 강력한 규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닥친 탓이다.
■ "오렌지 주스가 사라졌다"⸱⸱⸱기후가 부른 '플레이션'의 습격
기후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당장 기업의 재무제표를 흔드는 '실적 쇼크'로 현실화했다.
20일 식품 업계에 따르면 최근 이상기후로 인한 농작물 작황 악화는 글로벌 공급망을 타격하며 원가 부담을 급격히 키우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렌지 쇼크'다. 브라질과 미국 플로리다 등 주요 산지의 가뭄과 감귤녹화병 확산으로 작년 오렌지 선물가격이 폭등했다. 이에 일본의 아사히음료와 모리나가유업 등 글로벌 기업들은 오렌지 주스 판매를 중단하거나 생산을 축소하는 결단을 내렸다.
국내산 수급이 어려운 제과 업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서아프리카의 가뭄과 병충해로 코코아 가격이 2023년 톤당 3310달러에서 올 상반기 9236달러까지 치솟으면서 롯데웰푸드 등 주요 업체의 수익성이 뚜렷하게 저하됐다.
문제는 이 현상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은행 등의 분석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구조적인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소비자의 실질 소득을 감소시키고 이는 결국 음식료 업체의 장기적인 영업 실적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식량자급률 20%의 그늘⸱⸱⸱'식량 무기화'에 속수무책
대한민국의 낮은 식량자급률은 공급망 위기 시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1970년대 80%대에 달했던 국내 곡물 자급률은 2020년대 들어 20% 초반까지 추락했다. 특히 가공식품의 핵심 원료인 밀, 옥수수, 팜유의 자급률은 1% 이하로, 사실상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식량 보호무역주의'는 한국 기업들에 심각한 위협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밀과 옥수수 가격이 폭등했던 것처럼 지정학적 리스크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2022년 팜유 수출을 일시 중단했고 인도는 쌀과 설탕 수출을 제한하며 식량을 전략 물자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글로벌 곡물 시장이 ADM, Bunge, Cargill, LDC 등 이른바 'ABCD'로 불리는 4대 메이저 기업에 의해 과점됐다는 사실이다. 국내 업체들이 가격 협상력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향후 주요 교역국과의 협상에서 식량이 무기화될 경우,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 EU 산림규제부터 중대재해 금융제재까지⸱⸱⸱옥죄는 ESG 규제
규제의 장벽 또한 높아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산림 파괴 방지를 위해 도입한 'EUDR(산림전용방지법)'이 대표적이다. 커피, 카카오, 팜유, 대두 등을 취급하는 기업은 오는 2027년부터 해당 제품 생산 과정에서 산림 파괴가 없었음을 입증해야만 EU 수출이 가능하다. 이는 복잡한 실사 비용 증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옥수수 등 일반 곡물로 규제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서는 '안전' 이슈가 기업의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9월 '중대재해 관련 금융리스크 관리 세부방안'을 발표하며 산업재해가 발생한 기업에 대해 대출 한도를 축소하거나 금리를 할증하는 등 강력한 금융 제재를 예고했다. 국민연금 역시 투자 결정 시 산재 발생 이력을 감점 요인으로 대폭 강화했다.
이제 산업재해는 단순한 보상 비용의 문제를 넘어 자금 조달 자체를 막아 기업의 존립을 위협하는 재무적 리스크로 진화했다. 과거 SPC그룹이나 남양유업의 사례에서 보듯, 소비자들의 '불매운동'과 '캔슬 컬처'는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산업재해는 기업 가치와 투자 의사결정에 직결되는 핵심 리스크"라며 "이제 안전을 비용이 아닌 '경쟁력'으로 인식하고, 협력사를 포함한 공급망 전체를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사고 빌려 쓰느니 직접 캔다"⸱⸱⸱밸류체인 내재화 사활
사면초가에 놓인 국내 음식료 업체들은 '공급망 내재화'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단순히 원재료를 사 오는 것을 넘어, 직접 생산하고 유통하는 단계로 밸류체인을 확장하는 것이다.
사조그룹은 제분(사조동아원)에 이어 최근 글로벌 식품소재 기업인 인그리디언코리아(현 사조CPK)를 인수하며 전분당 생산 능력까지 확보했다. 곡물 수입부터 가공, 완제품 생산까지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를 통해 외부 충격을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하림그룹 역시 해운사 팬오션을 인수한 이후 미국 곡물터미널 지분을 확보하는 등 곡물 유통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종 산업 간 '합종연횡'도 활발하다. CJ제일제당은 일본 이토추상사와, 대상은 포스코인터내셔널과 손잡고 각각 해외 공급망 확보에 나섰다. 종합상사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식량 터미널을 활용해 안정적인 조달처를 마련하려는 시도다.
한국신용평가 이주호 선임연구원은 "현재 음식료 업계가 겪고 있는 위기는 단발성 사건이 아닌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며 "기후 위기와 공급망 붕괴, 엄격해진 사회적 책임 요구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상수가 된 만큼, 단기적인 판가 인상을 넘어 공급망 전체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기후위기는 더 이상 북극곰을 살리자는 도덕적 호소가 아니라,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 먹고사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 리스크는 곧 금융 리스크로 전이되고 있다"며 "탄소 중립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되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 이 기사는 19일자 한신평 <음식료 업계가 마주한 변화 – ESG 위기요인> 보고서를 바탕으로 재생산되었습니다.
[저작권자ⓒ 예결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